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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지식 아카이브 · 2026-10-26 · 대화 범위에서 총합·증보 · 상세 사료 대조 필요

코펜하겐에서 나가사키까지: 대북부전신회사는 동아시아의 바다에 어떻게 전선을 놓았는가

덴마크 대북부전신회사의 러시아 양허·영국 협상·일본 육양 허가·부설선·케이블 기술과 1871~1872년 개통, 1883년 부산선의 사업사를 다룬다.

이 글의 목차 · 19개 절
  1. 프롤로그: 전선 한 가닥을 그리기 전에, 먼저 제국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2. 1막, 코펜하겐: 전신회사로 세계의 시간을 판다는 사업 구상
  3. 러시아 황실로 통하는 인맥
  4. 2막,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런던: 허가를 사고 경쟁자와 나누다
  5. 러시아가 원한 것은 시베리아선의 끝을 세계망에 잇는 일
  6. 영국 경쟁사: 다투다가 합의한 국제 인프라의 규칙
  7. 3막, 도쿄와 청의 항구: 전선의 마지막 100m가 가장 정치적이다
  8. 4막, 수에즈를 지나는 원정대: 배 속에 감아 넣은 바다의 미래
  9. 어떤 배가 전선을 놓았나
  10. 케이블의 내부: 얇은 신호와 두꺼운 보호
  11. 길이는 얼마나 되었나
  12. 5막, 나가사키: 호텔방 하나가 세계와 이어지다
  13. 좋은 항구가 좋은 육양지는 아니었다
  14. 6막, 상하이와 양쯔강: 닻 하나가 수백 해리의 수고를 끊는다
  15. 7막, 개통: 1871년 여름의 첫 서비스와 1872년의 두 번째 문
  16. 완공 뒤에도 남은 이상한 장면
  17. 8막, 1883년: 회사는 왜 조선까지 왔나
  18. 에필로그: 회사의 프로젝트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19. 활용 자료와 검증 경계

프롤로그: 전선 한 가닥을 그리기 전에, 먼저 제국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1870년대 초 동아시아 바닷속에 구리선을 놓으려면 어떤 일을 해야 했을까. 오늘날이라면 경로를 측량하고 제조사를 선정하고 선박을 예약하는 대형 통신 인프라 사업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사업자의 책상 위에는 설계도뿐 아니라 러시아의 극동 정책, 청의 항구, 일본의 개항장, 영국의 아시아 전신망, 덴마크 정부와 왕실의 외교가 한꺼번에 올라와 있었다.

덴마크의 대북부전신회사(Great Northern Telegraph Company)가 추진한 것은 나가사키에서 상하이와 블라디보스토크로 바닷속 케이블을 뻗고, 상하이에서 홍콩으로 이어 유럽과 동아시아의 정보를 연결하는 프로젝트였다. ‘1890년대에야 청과 일본이 근대함대를 갖췄다’는 익숙한 이미지보다 한참 앞선 사업이었다.

그렇다고 ‘덴마크 회사가 정식 국제공개입찰에서 최저가로 낙찰받았다’는 식으로 쓸 수는 없다. 이 사업에서 확인해야 할 ‘입찰’과 ‘계약’은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다. 러시아의 사업권 부여, 일본의 육양 허가, 영국계 전신회사와의 경쟁 및 수익 분배, 선박·케이블 제작 계약은 하나의 입찰행위가 아니었다. 러시아가 1868년 부설권 제안을 요청했고 덴마크 쪽이 기회를 얻었다는 설명은 전해지지만, 공고서·경쟁 제안서·최종 낙찰 문서를 이 원고에서 원전 대조한 것은 아니다.

이제 전신선의 제작과 완공을 단일한 기술적 성공이 아니라 상업적 교섭, 외교적 양허, 해상 공사와 실패를 통과한 원정으로 따라가 보자.

1막, 코펜하겐: 전신회사로 세계의 시간을 판다는 사업 구상

1869년 대북부전신회사의 형성을 주도한 인물은 덴마크의 금융가·사업가 카를 프레데리크 티에트겐(C. F. Tietgen)이었다. 사업 논리는 간단하면서 엄청났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육상 전신망이 태평양 끝까지 도착하고, 여기서 나가사키·상하이·홍콩으로 이어지면 유럽과 동아시아의 장거리 통신은 항해일정을 기다리는 문제가 아니게 된다.

그 이전에는 한 지역의 정치적 소식을 다른 지역으로 보내기 위해 편지·선박·역참과 여러 번의 재전달이 필요했다. 전신은 이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대신 비싼 운임, 국가의 허가, 끊어지는 선로와 복잡한 중계를 요구했다. 무엇을 운송하는 회사인가? 사람도 화물도 아니라 ‘먼저 알 수 있는 시간’을 파는 회사라는 발상이었다.

덴마크가 영국이나 러시아처럼 큰 시장과 광대한 식민망을 가진 제국은 아니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덴마크 회사는 자국 영토를 넓히는 대신, 다른 제국들의 끝점을 연결하는 사업권을 확보함으로써 국제망의 중요한 부분을 맡을 수 있었다. 티에트겐의 금융력만으로 가능한 사업은 아니었다. 차입과 투자, 공사 선박, 육양지점, 통신 서비스에 대한 독점·특허 성격의 계약이 함께 돌아가야 했다.

러시아 황실로 통하는 인맥

덴마크 왕실과 러시아 황실의 인척관계는 이 사업사의 흥미로운 배경으로 종종 등장한다. 훗날 러시아 황후가 된 덴마크 출신 다우마 공주는 러시아 황태자 알렉산드르와 결혼했다. 이 관계가 러시아와 덴마크의 정계·재계 사이에 친밀한 분위기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소개된다. 다만 왕실 인맥이 특정 계약의 낙찰을 직접 결정했다는 결론을 내리려면 계약 체결 문서와 왕실의 개입을 추적해야 한다. 친족관계는 알려진 사실이고, 사업권 취득에서 그 관계의 결정적 작용은 별개의 검증 문제다.

2막,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런던: 허가를 사고 경쟁자와 나누다

러시아가 원한 것은 시베리아선의 끝을 세계망에 잇는 일

러시아는 시베리아와 극동의 전신망을 정치·군사·행정 통치의 수단으로 보았다.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한 동아시아 해저선은 기존 육상망의 종착점을 통과지점으로 바꾸었다. 러시아 입장에서 전신은 군대보다 먼저 명령이 가고, 무역선보다 먼저 시세가 움직이는 새로운 기반시설이었다.

사업자 입장에서는 러시아가 통과와 접속을 허가하더라도 일본의 항구에 케이블을 올릴 권리는 자동으로 따라오지 않았다. 청의 항구, 영국의 홍콩과 연결되는 서구 자본의 전선에서도 같은 문제가 발생했다. 전류가 국경을 넘어간다는 사실은 국경이 없어졌다는 뜻이 아니다.

영국 경쟁사: 다투다가 합의한 국제 인프라의 규칙

19세기 해저전선 제조·부설의 기술적 중심은 영국이었다. 대서양 사업에서 축적한 자본·선박·케이블 제작 경험이 영국 전신회사들의 경쟁력이었다. 덴마크 회사가 러시아 쪽 사업권을 얻었다고 해도 영국계 선로와 충돌하거나 항구 접속이 막힌다면 계획은 경제적으로 불안정해진다.

대화에서 소개된 역사자료에 따르면 1870년 5월 덴마크 측과 영국계 전신사업자가 비밀 협정을 맺어 상하이–홍콩 구간의 건설·운영과 수익배분, 사무소 공동 운영을 조정했다. 경쟁자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협력자이자 수입을 나눠 갖는 상대가 되었다. 당시 국제 전신사업에서 단일 회사가 모든 지역을 독점 시공하기 어려웠던 현실이 여기에 드러난다.

이 교섭을 ‘영국 회사가 기술을 전부 내주고 덴마크가 모든 이익을 가져간 거래’로 설명할 수는 없다. 양측은 기존 노선과 고객망, 입항권, 수익이라는 서로 다른 자산을 교환했다. 구체적인 배분율과 책임 조항은 실제 1870년 협정 원문으로 확인해야 한다.

3막, 도쿄와 청의 항구: 전선의 마지막 100m가 가장 정치적이다

대북부전신회사는 덴마크 정부의 외교적 협력을 받아 청과 일본에 접근했다. 율리우스 시크(Julius Sick)가 회사 비용으로 동아시아의 교섭에 파견되었다는 설명이 전해진다. 사기업이 비용을 대고 정부의 외교 창구를 활용하는 방식은 ‘민간기업’과 ‘국가 외교’의 경계가 당시 이미 복잡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일본 쪽에서는 당초 요코하마·오사카·나가사키 같은 여러 기착점을 원했다는 설명이 있고, 교섭 결과 나가사키–상하이, 나가사키–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노선이 정리되었다. 1870년 9월 20일 일본 정부의 부설 허가가 일본측 연표에 등장한다. 일부 자료에는 나가사키–요코하마 계획도 허가에 포함되었다고 소개되므로, 최초 요청 노선·허가 노선·실제 개통 노선을 동일한 목록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왜 허가가 그토록 중요했을까. 전선은 아무 해변에나 묻을 수 없었다. 해저 케이블이 뭍에 올라오는 육양지점, 그 케이블이 이어지는 건물, 그 건물에서 도시 전신국까지 연결하는 전신주와 도로점용, 직원과 장비의 상주권, 전보요금과 고객 취급권이 모두 필요했다. 바다의 1,000km를 성공해도 육지의 마지막 몇 미터를 허가받지 못하면 사업은 끝나지 않는다.

4막, 수에즈를 지나는 원정대: 배 속에 감아 넣은 바다의 미래

어떤 배가 전선을 놓았나

1860년대 중반 대서양 해저전신을 성공시킨 경험은 이미 있었다. 거대한 철제 증기선 그레이트 이스턴(Great Eastern)은 대양 횡단 케이블을 선내 탱크에 싣고 풀어놓는 기술을 상징했다. 1870년 동아시아 사업은 그 이후에 진행된 공사였으므로 ‘증기선이 그렇게 발전했을 리 없다’는 의문은 자연스럽지만, 이미 해저전신 부설선이라는 전문적 운송·작업 기술이 존재했다.

대화에서 전한 원정 자료는 케이블 운반·부설에 동원된 선박으로 Cella, Great Northern을 꼽고, 덴마크 해군 프리깃 Tordenskjold(토르덴스키올)의 지원을 설명한다. 자료마다 선박의 수와 각자 수행한 기간·역할이 다른 방식으로 소개될 수 있으므로 ‘케이블선 세 척과 군함 한 척’이라는 개요와 각 선박의 구체 명단을 한 치 오차 없는 선단표로 취급하지 않는다.

토르덴스키올에는 수심 조사, 케이블 운반 보조, 경비와 외교적 위신 과시 등 여러 역할이 부여되었다고 전한다. 이 배의 수에즈 운하 통과는 운하가 원거리 기술사업의 항로를 새로 조직했다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소개된다. 해군의 존재는 해저전선 사업이 비무장 상업선의 순수한 기술 작업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케이블의 내부: 얇은 신호와 두꺼운 보호

당시 전신선의 중심에는 전기 신호를 전달할 구리 도체가 있었다. 이를 구타페르카(gutta-percha) 같은 절연재로 감싸 바닷물에 전류가 새지 않도록 했고, 다시 섬유와 철선 외장으로 보호했다. 해저 지형과 해안 위험에 따라 케이블의 굵기와 외장도 달라졌다. 닻에 긁힐 수 있는 항구 가까이에서는 굵고 무겁게, 먼 대양의 깊은 구간에서는 상대적으로 가볍게 만드는 식이다.

공사선의 갑판에서 중요한 것은 케이블을 많이 싣는 것만이 아니다. 항해속도와 케이블이 풀리는 속도를 맞추고, 장력을 억제하고, 절연 상태를 검사해야 했다. 너무 팽팽하면 바닥의 굴곡에 걸리고, 너무 느슨하거나 빠르게 풀리면 케이블이 엉키거나 계획과 다른 위치에 떨어질 수 있었다. 오늘날의 해저 광섬유 통신처럼 구간마다 전자 증폭장치를 깔아놓는 것이 아니라, 약해진 전신 신호를 민감한 수신기와 중계 시설에서 판독했다.

길이는 얼마나 되었나

대화 중 소개된 사업 연혁은 다음과 같은 구간 길이를 전한다. 해리(nautical mile)에서 km로 환산한 근삿값이며 실측한 동일 경로를 최신 지도에서 재측량한 값은 아니다.

구간소개된 길이환산 거리
나가사키–상하이491해리약 909km
나가사키–블라디보스토크772해리약 1,430km
상하이–홍콩950해리약 1,759km

대서양 횡단 케이블이 이미 가능했던 기술적 배경을 고려하면, 이 거리들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환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는 태풍·해류·암초·얕은 바다·어업과 항구의 닻이라는 고유한 위험이 있었다. 구간이 짧다고 해서 사업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5막, 나가사키: 호텔방 하나가 세계와 이어지다

좋은 항구가 좋은 육양지는 아니었다

나가사키는 일본의 대표적인 개항장이자 중국·러시아와 연결하기 좋은 접점이었다. 그러나 도시의 유명한 항구라고 해서 모든 해안이 케이블을 끌어올리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대화에서 소개된 나가사키 현지사 연구에 따르면, 1870년 10월 무렵의 조사에서 나가사키항 입구의 육양 조건이 좋지 않다고 판단되어 인근을 다시 조사했다.

그 결과 고가쿠라 센본(小ヶ倉千本)에 육양고를 두고 1871년 2월 시설을 갖췄다는 설명이 전한다. 육지에 올라온 케이블은 전신주 약 65개를 통해 거류지로 이어졌고, 외국인 거류지의 벨뷰 호텔 한 방이 전신회사 지점으로 쓰였다고 한다. 숫자와 위치의 정확한 도면은 별도 대조 대상이지만, 작은 호텔방과 먼 바다를 가로지르는 케이블이 이어졌다는 그림은 이 사업의 규모감을 가장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일본의 세계통신망은 거대한 수도의 대리석 통신청사가 아니라 항구의 육양고와 전신주, 호텔방에서 시작될 수 있었다. 이 장면은 상상이 아니라 대화에서 제시된 지역사 설명에 기초한 공간 재구성이다.

6막, 상하이와 양쯔강: 닻 하나가 수백 해리의 수고를 끊는다

양쯔강 하구와 상하이 일대의 케이블 설치는 단순히 ‘전선을 물속에 떨어뜨리는 일’이 아니었다. 강 하구의 배들은 닻을 내리고, 짐을 싣고, 흙탕물과 조류를 따라 움직였다. 한 번 닻이 해저 케이블에 걸리면 수십·수백 해리를 따라온 신호가 끊어질 수 있었다.

대화에서 소개된 덴마크 관련 회고 자료에는 케이블이 지나가는 곳에 배들이 닻을 내리지 못하도록 무장 경비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세부 상황은 회고자료의 원문 검증이 필요하지만, 케이블의 보호가 선박 통제와 항만행정의 문제였다는 설명과 맞아떨어진다. 공사를 끝내도 해안과 항구에서 누가 선박을 통제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남았다.

또 상하이–홍콩 구간은 제작된 케이블의 절연 품질 문제 때문에 개통 일정에 차질이 있었다는 설명이 전한다. 바닷속에 이미 놓은 케이블은 공장 제품처럼 간단히 회수·교환할 수 없었다. 이 시대의 인프라 사업에서 기술적으로 가장 긴장은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전기가 제대로 통하는지 의심해야 한다는 사실에 있었다.

7막, 개통: 1871년 여름의 첫 서비스와 1872년의 두 번째 문

대화에서 소개된 자료를 조합하면 공사의 시간표는 대략 다음과 같다.

시기확인된 또는 소개된 단계의미
1868~1869년러시아 측 사업권 구상·교섭과 대북부전신회사의 설립금융·외교적 사업 기반
1870년 5월영국계 전신회사들과 수익·운영 협력 합의가 있었다는 설명경쟁망 사이 접속 문제
1870년 9월일본 정부의 부설 허가육양·운영을 위한 현지 권리
1870~1871년선단 항해, 수심 조사, 케이블 운송·부설, 육양고 건설해상 기술사업
1871년 4월상하이–홍콩 방면 구간의 서비스 개통남쪽 국제망 연결
1871년 8월 4·12일나가사키–상하이 개통과 해외전보 업무 개시로 소개되는 날짜일본의 중국·세계망 연결
1872년 1월 1일나가사키–블라디보스토크 개통으로 소개되는 날짜러시아 시베리아망 연결
1883년 11월요부코–이키–쓰시마–부산 해저선 개통일본·조선 연결

개통일의 차이는 곧 오류라고 단정할 수 없다. 공사 완료일, 시험 통전일, 정식 개통일, 일반인의 요금 지불을 받는 서비스 시작일이 서로 달랐을 수 있다. 단지 자료에 날짜가 두 개 보인다는 이유로 임의로 하나를 지워서는 안 된다.

초기 전보 요금은 대단히 비쌌다. 대화에서 인용된 나가사키의 안내에는 나가사키–상하이 20자에 은화 3달러라는 요금이 소개된다. 이 가격은 편지 한 장을 보내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고가였지만, 선박을 기다리지 않고 상품 시세·군사 동향·외교 훈령을 신속히 알 수 있는 상인과 정부에는 지불할 이유가 있었다. 각 나라의 화폐가 달랐고 중계가 추가될 때 비용도 달라졌으므로 이 하나의 요율로 전체 사업의 매출이나 수익을 계산할 수 없다.

완공 뒤에도 남은 이상한 장면

나가사키에서 상하이까지 수백 km는 전기 신호로 건너갈 수 있는데, 개통 초기에 나가사키에서 일본 동쪽의 요코하마까지 문서를 사람이 운반해야 했다는 설명이 전한다. 국제망이 국내망보다 먼저 왔기 때문이다. 1873년 나가사키와 일본의 주요 도시를 잇는 국내 전신 연결이 개선되면서 이 병목이 완화되었다.

다르게 말하면 일본은 먼저 세계와 이어지고, 그다음 일본 안에서 이어졌다. 우리가 국가별 ‘전신 도입 연도’라는 하나의 숫자로 정리하면 사라지는 역사다.

8막, 1883년: 회사는 왜 조선까지 왔나

1871년 나가사키가 세계망의 일본측 관문이 된 뒤 약 10여 년, 같은 회사는 조선과 일본 사이의 부산 해저전선에도 참여했다. 1882년 일본 정부가 일본–아시아 간 국제통신에 관한 독점권을 부여하고, 관련 조건 아래 부산선 부설이 이루어졌다는 지역사 설명이 있다. 조선과 일본은 1883년 부산구설해저전선약관을 체결했고, 일본측 규슈·이키·쓰시마를 거쳐 부산으로 이어지는 선은 1883년 11월 개통되었다.

이 단계의 사업은 1870년 러시아에서 나온 최초의 노선과는 다른 정치적 맥락을 지녔다. 일본은 조선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더 빨리 파악하고 본국의 지시를 보내려 했다. 청 역시 한성–의주 방면 전신선을 통해 조선을 대륙의 정보망에 결박하려 했다. 조선의 전신망은 한 번에 한 회사가 완성한 ‘서울–도쿄 직통’이 아니라, 1883년 부산 해저선과 1885년 서로전선, 1888년 남로전선이 이어지며 단계적으로 생겨났다.

부산선의 조약에는 준공 후 일정 기간 경쟁 외국 전선의 개설을 제한하는 취지의 조건이 소개된다. 케이블 부설비를 누가 부담하는가보다 더 큰 문제는 누가 그 전선을 쓸 수 있고 누가 다른 전선의 부설을 거절할 수 있는가였다. 전신선의 독점은 물리적 시설의 독점이면서 국제통신의 관문을 만드는 일이었다.

에필로그: 회사의 프로젝트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 사업의 가장 극적인 대조는 육양고의 작은 방과 그 위에 얹힌 다섯 제국의 이해관계 사이에 있다. 덴마크의 금융가가 구상한 선로는 러시아의 육상망과 일본의 개항장, 청의 항구와 영국계 국제망을 연결했다. 배는 수에즈를 통과하고, 기술자들은 케이블을 풀면서 장력을 확인하고, 외교관은 남의 항구에 전선을 올릴 권리를 요구했다. 전선은 바다 아래에서 보이지 않았지만 그 전선을 누가 소유하고 운영하는가는 세계 정치의 한가운데 있었다.

1851년 도버–칼레 전선의 초기 비용이 적어도 케이블 제조에 9,000파운드, 전신소 설비에 6,000파운드였다는 비교 사례도 소개된다. 그러나 이를 나가사키–상하이 거리만큼 단순 배수 계산해 동아시아 프로젝트 비용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케이블 굵기·해저 지형·노선·수송·선박·노무·토지와 사업권 비용이 모두 다르다. 동아시아 사업의 실제 자본금·계약 금액·정산 내역은 현재 제공된 자료만으로 확정하기 어렵다.

기술의 위대함은 전류가 바다를 건넜다는 데만 있지 않다. 왕실 인맥과 국가의 허가, 투자자의 계산, 영국 경쟁사와의 타협, 항구 노동, 측량과 절연검사, 그리고 매일 전보를 받아 적은 전신기사의 일이 하나의 통신 체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프로젝트는 덴마크 한 회사의 승리인 동시에, 기술이 작동하려면 얼마나 많은 정치와 노동이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19세기의 대표적 장면이다.

활용 자료와 검증 경계

아래 문헌·기관은 앞선 설명에서 실제로 소개되거나 링크된 자료다. 이번 편집에서는 새 외부 열람·교차 조사를 하지 않았다. 본문에 등장하는 교섭·선박·개통일의 일부는 소개 자료의 요약에 의존한다.

추가 확인이 필요한 세부: 1868년 러시아 ‘입찰’의 계약 형태와 낙찰 근거, 1870년 비밀 협정의 원문, 일본 초기 허가 노선과 영업 노선의 차이, 케이블선의 정확한 명단과 항해일지, 1871~1872년의 개통 정의, 실제 총사업비와 수익·손실, 1883년 부산선 독점계약의 구체 조항. 사료 확인 전에는 장면을 역사적 현장 목격담으로 꾸미거나 인물의 대사를 만들어 넣지 않는다.

연결된 글

자료·검토 표기: 내부 총합 · 외부 미검증